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르후 전투 (문단 편집) == 기타 == * 청나라의 고종 [[건륭제]]는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한 명나라 장수들 중 두송에게는 '''무장'''(武壯), 유정에게는 '''충장'''(忠壯)이라는 시호를 추증했다. 그리고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살한 교일기에게도 '''충렬'''(忠烈)이라는 시호를 추증했다. 이는 청나라가 자신과 싸운 명나라의 충신들을 높이 기려도 될 만큼 체제가 안정되었음을 뜻한다. * 사실 전투가 벌어진 곳은 [[고조선]], [[고구려]], [[발해]]의 옛 영역이었으며, 특히 고조선과 부여, 고구려가 발원한 지역이었다. 조선군이 참패한 푸차 평원은 현재 환인만족자치현(桓仁满族自治县)의 화래진(华来镇)인데, 이곳은 '환'(桓)자가 붙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고조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 하고, [[주몽]]이 나라를 세운 [[졸본]]성 및 [[오녀산성]]도 이 근처에 있다. 이곳 자체도 압록강에서 북쪽으로 100km도 안되는 거리에 위치한다. 안타깝게도 발해 이후로는 [[한민족]]과 영영 멀어진 땅이 되었다. * 변방의 민족이 자신을 토벌하려던 대제국의 군대를 자신의 본거지인 밀림으로 끌어들여 섬멸했다는 점에서, 서기 9년 [[게르만족]]의 부족들이 연합해 [[로마군]] 3개 군단을 섬멸한 [[토이토부르크 전투]]와 비슷하지만, 당시의 [[로마 제국]]은 [[아우구스투스]] 황제가 집권해 국력이 최정점기였고, 3개 군단이 전멸했어도 국력이 튼실했기 때문에 [[게르마니아]]로의 진출이 좌절되는 것만으로 끝났지만, 명나라는 쇠퇴기였기 때문에 이 패배가 제국의 멸망까지 이어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